第1章
나는 태생적으로 겁이 많은데 하필 중증 기면증까지 있다.
공포를 마주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잠들어 버리는 그런 기이한 병이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내가 잠들고 나면 제2의 인격이 발현되면서 전투력이 만렙이 된다는 것이다.
8살이 되던 해, 나는 사나운 개에게 놀라서 기절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그 개가 내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17살 되던 해, 나는 강도에게 놀라서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강도가 경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감옥에 보내 달라고 빌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감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고 애썼고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았다.
대학에 와서 캠퍼스 남신으로 불리는 애와 같은 기숙사 방을 쓰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신입생 환영회 날, 그 남자는 나를 체육 기구실에 몰아넣고 손에 가위를 든 채 악의에 찬 얼굴로 웃었다.
“이렇게 촌스럽게 생겨서는 감히 내 여자친구를 꼬셔?”
“오늘 그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을 아주 망가뜨려 주겠어. 그런 뒤엔 뭘로 꼬시나 보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나는 시비 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해서 기절하게 만들면 상황이 좀 보기 안 좋을 거야...”
그러나 남자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고 뺨을 후려쳤다.
“뭘 그렇게 재는 거지? 꼬우면 너도 한 대 치던가.”
나는 강력한 한 방에 두 눈이 뒤집히며 그대로 기절했다.
남자가 막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린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내가 갑자기 기괴한 자세로 튕기면서 일어났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한 손으로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10분 뒤, 경비원이 체육 기구실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캠퍼스 남신이라는 그 남자는 얼굴이 시퍼렇게 붓고 코피가 터진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벽 모퉁이에 기댄 채 새근새근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제1화
경비원이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을 때, 눈앞의 기괴한 광경을 보고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더니, 죽마고우 신서민이 인파를 헤치고 뛰어 들어왔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신서민의 익숙한 얼굴을 보자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막 깨어난 나는 콧소리로 신서민을 불렀다.
“서민아, 쟤가 방금 가위를 들고...”
그러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한발 앞서 신서민의 팔을 붙잡은 차태우가 그 뒤로 숨더니, 놀라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민아, 살려줘! 나는 그냥 왜 자꾸 내 여자친구한테 추근대는 메시지를 보내냐고 물어보려던 것뿐인데, 갑자기 미친 듯이 사람을 때리더니 가위로 죽이려고 했어!”
그 말에 나는 얼이 빠졌다.
확실히 여자 꼬시는 선수는 선수라서 그런지 고자질하는 데 굉장히 능했다.
그리고 나는 조급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고 신서민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쟤가 먼저 손을 댔어. 나는 놀라서 기면증이 발작하는 바람에...”
“그만해!”
신서민은 얼굴 가득 혐오하는 기색으로 내 말을 끊었다.
“노민혁,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연기하는 거 지겹지도 않아?”
신서민은 나를 내려다보았고 눈빛은 차가웠다.
“의학적으로 무서워하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병 같은 건 없어. 태우가 알려 주지 않았으면, 나는 너처럼 거짓말만 하는 사람한테 계속 속고 있을 뻔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져서 손가락만 조금씩 움켜쥐었다.
신서민은 나의 죽마고우였다.
이 특이한 체질 때문에 나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괴물이라고 여겼고, 자격지심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피했다.
그런 나를 늘 앞에서 막아 준 사람이 신서민이었다.
“너는 괴물이 아니야. 앞으로는 내가 지켜 줄게.”
그런데 나를 지켜주겠다던 수호천사는 지금 내 반대편에 서서, 나를 해치려던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들자, 마침 신서민 뒤에 숨은 차태우가 도발적인 미소를 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1학년 개강 무렵, 신서민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내 침대를 깔아 주고 책상을 닦아줄 때 차태우는 옆에서 비아냥거렸다.
“노민혁은 저렇게 평범하게 생겼는데, 왜 서민이 같은 애가 알아서 시중을 들어주는 거지?”
그날 이후 차태우는 부리나케 학생회에 들어갔고, 툭하면 신서민과 어울릴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신서민은 나와의 약속을 자주 어기기 시작했다.
내가 속상해서 따져 물으면 신서민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너 이렇게 억지 좀 부리지 않으면 안 돼? 내가 학생회장인데 신입생 좀 챙기는 게 뭐 어때서?”
내 눈앞에서 서로 기대고 선 두 사람을 보자 문득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챙기기는 무슨.’
저 둘은 진작부터 몰래 붙어먹으면서, 나를 두 사람의 놀이감으로 삼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제2화
다음 날, 학교 커뮤니티가 폭발했다.
차태우가 상해진단서를 한 장 올리고는 속셈이 잔뜩 드러나는 장문의 글을 곁들였다.
문구마다 전부 내가 자기 여자친구 진하람을 꼬시려다 실패하자, 부끄러움에 화가 나서 자기한테 상해를 입혔다고 성토하고 있었다.
뒤이어 학생회에서 공고가 올라왔다.
[노민혁 학생이 시비를 유발하여 그 영향이 심각하므로, 이번 학기에 취득한 학점 전부를 인정하지 않는 중징계를 내린다.]
[작성자: 학생회장 신서민.]
학점 전부를 삭감하고 중징계를 내리는 건 일개 학생회에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공고가 나온 건 사실이었다.
수업에 가는 길에 주변 사람들은 전부 나를 손가락질했다. 심지어 내 전공 교재는 누군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나는 울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교재를 주워서 먼지를 털어 낸 다음 곧장 학생회 사무실로 갔다.
신서민은 책상 앞에 앉아 뭔가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나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러 왔어? 아직 덜 창피해?”
나는 신서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체육 기구실에 CCTV가 있어. CCTV도 확인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처사하는 건 직권 남용에 감싸기야.”
신서민이 코웃음을 쳤다.
“CCTV는 고장 났어. 민혁아, 지금 우리 학교 방송실에 가서 태우한테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징계 취소를 생각해 볼 수도 있어.”
바로 그때, 옆에서 내내 고개를 처박고 게임을 하던 학생회 부회장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티 없이 맑은 얼굴로 멍청한 소리를 했다.
“뭐? CCTV가 고장 났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난주에 시설관리팀에서 전교에 4K 고화질 야간 투시 CCTV로 새로 갈았잖아. 사인할 게 있다고 해서 내가 했는데?”
그 말에 나는 신서민을 쳐다보았다.
펜을 쥔 신서민의 손이 굳어지면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지더니 내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신서민은 전부 알고 있었다.
CCTV가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도, 어쩌면 이미 그 영상을 봤을지도 몰랐다.
그러고도 신서민은 차태우를 도와서 나를 망가뜨리려 한 것이다.
“신서민, 너 정말 역겨워.”
나는 그 말을 던지고 돌아서서 학생회 사무실을 나왔다.
일은 해결되지 않았는데 화만 잔뜩 쌓였다. 하지만 시간을 보니 일단 수업부터 들어가야 했다.
증거는 천천히 모으면 될 일이었다.
오후에는 수영 수업이 있었다.
수업을 해주시는 강사님은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며 다들 알아서 훈련하라고 했다.
내가 막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 가장자리로 걸어가는데, 차태우와 여자친구 진하람이 깊은 쪽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체대생이라 몸집도 크고 탄탄한 진하람이 내 앞으로 걸어와 험한 말을 늘어놓았다.
“아, 네가 노민혁이야? 어제는 내가 없어서 운이 좋은 줄 알아. 안 그랬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거야!”
차태우가 얼른 진하람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됐어요. 하람 선배. 쟤도 순간적으로 판단이 흐려진 거예요. 그러니까 괜히 따지지 마요.”
말을 마친 차태우는 고개를 돌리면서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소름이 돋을 만큼 음침해서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꿨는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차태우는 내가 몸을 돌려 수건을 집는 틈을 타서 내 무릎 뒤를 힘껏 걷어찼다.
곧바로 발이 미끄러지면서, 나는 그대로 수심이 깊은 쪽에 처박혔다.
막 허우적거리며 수면 위로 올라오려는 순간, 킥판 하나가 내 머리 위를 눌렀다.
차태우는 물가에 서서 온몸의 힘을 다해 그 킥판을 밟고 있었다. 얼굴에는 일그러진 웃음이 걸려 있었다.
물이 미친 듯이 입과 코로 밀려들자, 질식감과 함께 거대한 공포가 순식간에 나를 삼켰다.
나는 물속에서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만약 심박수를 잴 수 있었다면 아마도 180도 넘었을 것이었다.
곧 두 눈이 뒤집히면서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제3화
수면이 갑자기 잔잔해지자 차태우는 킥판을 밟은 채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 버티나 했더니 벌써 조용해졌네?”
그러나 차태우가 우쭐거릴 틈도 없이 물속에서 손 하나가 불쑥 뻗어 나와서 남자의 발목을 붙잡았다.
“악!”
이에 차태우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손은 힘껏 잡아당기면서 곧장 깊은 쪽으로 끌어당겼다.
물속에서 내 제2의 인격이 발현되면서 몸의 주인이 바뀌어버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차태우의 목을 움켜쥐고 수영장 바닥으로 눌렀다.
물가에 있던 진하람이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태우야!”
그러더니 연하의 남자친구를 구하겠다고 수영장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내 곁으로 헤엄쳐 온 진하람은 주먹을 휘두르며 내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진하람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 덩치 큰 체대생을 수영장 바닥에 대고 미친 듯이 처박았다.
수영장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몇 분 뒤, 물가로 헤엄쳐 올라온 나는 눈이 까뒤집혀진 차태우와 진하람도 함께 끌어 올렸다.
진하람 곁으로 다가간 나는 두 손을 포개서 여자의 가슴 위에 올리고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다만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곧 뼈가 부러지는 맑은소리가 울리더니, 진하람이 물을 왈칵 뿜어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 차태우는 스르르 깨어났다.
차태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진하람은 움푹 꺼진 가슴을 감싸 쥔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다음 압박을 준비하고 있었다.
차태우는 겁에 질려 엉금엉금 기어서 벽 모퉁이로 물러났다.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그저 이를 딱딱 부딪치기만 했다.
차태우는 온전한 문장 하나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미쳤어... 저건 괴물이야... 괴물!”
같은 과 학생의 연락을 받은 신서민이 마침 도착해서 이 광경을 보더니, 곧바로 달려와서 나를 밀쳤다.
“노민혁! 이 미친놈아!”
그 손에 밀려 뒤통수를 타일에 부딪친 나는 아파서 순간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깨어난 나는 여전히 내 작품에 화들짝 놀랐다. 그래도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쓰레기 같은 남녀를 보고 있자니, 그저 시원하게 인과응보를 당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제어할 틈이 없이 너무나 커져 버렸다.
차태우는 진하람과 손잡고 학교에 나를 제적시키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이에 학교는 즉시 공개 청문회를 열었다.
신서민은 학생회장 자격으로 정색을 하면서 제안했다.
“노민혁 학생에게는 심각한 폭력 성향이 있어요. 전교 교직원과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즉시 제적할 것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나는 마치 차가운 얼음 구덩이에 떨어진 것 같았다.
신서민이 아무리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였다.
그러나 차태우 하나 때문에 신서민은 정말로 나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내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려던 그때, 방청석에서 평소 주눅 들어 지내던 남학생 하나가 갑자기 일어섰다.
나의 또 다른 룸메이트로, 평소 기숙사에서 차태우에게 이런저런 심부름을 숱하게 맡아서 하던 아이였다.
“저, 저기요...”
남자는 휴대폰을 들어 올렸고 목소리는 떨렸지만 아주 단호했다.
“제가 어젯밤에 체육 기구실에서 물건을 정리하다가 휴대폰을 거기 두고 왔는데요, 마침 영상이 하나 녹화됐어요.”
대형 스크린에 휴대폰이 연결되자 화면이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차태우가 가위를 든 채 기세등등하게 내 코를 가리키며 촌스럽게 생겼다고 욕을 했고, 얼굴을 망가뜨려 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한 나는 가엾고 무력하게 바닥에 기절해 있는 모습이었다.
제4화
영상이 끝나자 청문회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차태우가 두르고 있던 밝고 훈훈한 캠퍼스 남신이라는 껍데기가 사람들 앞에서 확실하게 박살 난 것이었다.
곧 방청석에서는 곧바로 수군거림이 일었다.
“와, 저건 너무 악질 아니야? 가위로 사람 얼굴을 그으려고 했다니?”
“쟤가 아까 커뮤니티에서는 자기가 피해자라고 하지 않았나? 가해자가 피해자를 제적시키라고 소리친 격이네.”
상황이 본인이 생각하던 거와 달리 돌아가자,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차태우는 입술을 떨며 변명했다.
“저, 저건 합성이에요! 딥페이크라고요! 나는 저런 짓 한 적 없어요!”
그러나 이때, 평소 차태우를 밝고 해맑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그를 대신해서 나를 욕했던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차태우를 보는 눈빛은 무슨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것 같았다.
곧 차태우는 다급해져서 반사적으로 신서민의 소매를 붙잡았다.
“서민아, 네가 설명 좀 해 줘.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줘!”
신서민은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지만 그래도 억지로 앞에 나섰다.
“영상이 앞뒤 맥락을 잘라 냈을 수도 있어요. 태우는 평소 성격이 아주 좋아요. 이 사이에 분명 오해가...”
“오해는 무슨!”
성난 고함이 신서민의 말을 끊었다.
진하람이 방금 접합한 갈비뼈 부위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문 앞에 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지만, 내가 제적당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겠다고 기어이 몸을 끌고 온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제적은 못 보고 대신 한 편의 볼거리를 보게 되었다.
진하람은 신서민의 소매를 붙잡은 차태우의 손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눈에 핏발이 섰다.
“차태우, 너 제대로 설명해. 왜 쟤를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 너희 둘 대체 무슨 사이야?”
진하람은 성질은 불같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자기 남자친구가 일이 터지자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여자라니, 이건 확실히 여자친구로서 빡칠 만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남자친구 바람 현장을 목격한 여자친구, 이런 상황으로 번지려고 하자, 학과 교수님이 얼른 나서서 질서를 잡았다.
차태우는 허둥지둥 신서민을 놓고 달려가서 진하람을 달랬지만, 고개를 돌릴 때 나를 보는 눈빛은 한층 더 음침하고 독해져 있었다.
청문회의 결론은 이랬다.
나는 정당방위이자 반사적인 반응에 해당해서 징계받지 않았고, 차태우는 분란을 일으킨 이유로 중징계를 받았다.
영상이 내 결백을 증명해 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내가 눈을 감은 채 한 손으로 차태우를 공중에 들어 올린 기괴한 장면도 함께 찍혀 있었다.
학교에는 소문이 무성했고 다들 나를 건드리면 안 되는 괴물로 여겼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괴물이 만만한 호구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밥을 받을 때 아무도 내 앞에서 새치기를 하지 않게 됐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종강이 다가오면서 기말고사가 찾아왔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차태우의 자리가 하필 내 옆으로 배정되었다.
오른쪽 눈꺼풀이 미친 듯이 떨렸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시험이 더 중요했기에, 나는 불안감을 눌러 두고 답안 작성에 온 신경을 쏟았다.
시험이 절반쯤 지났을 때, 갑자기 종이 뭉치 하나가 내 발밑으로 굴러왔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감독관이 이미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날 바라보는 감독관의 눈빛은 매서웠다.
“발밑에 있는 거 주워요.”
차태우는 옆에 앉아 입꼬리에 성공했다는 차가운 웃음을 걸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차태우는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까? 설마 내가 커닝했다고 하려는 건가?’
그 가능성을 떠올리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필체부터가 다르니까 괜찮겠지.’
곧 나는 태연하게 종이 뭉치를 주워 감독관한테 건넸다.
감독관이 쪽지를 펼치자 순식간에 안색이 가라앉았다.
“커닝 페이퍼를 가져온 것도 모자라 감히 시험장에서 주고받기까지 해요?”
차태우가 즉시 손을 들고 큰 소리로 고자질을 했다.
“선생님, 저는 시험장에 들어올 때 노민혁이 주머니에 쪽지를 넣는 걸 봤어요!”
시험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쪽지를 편 감독관은 위에 적힌 커닝 내용을 막 읽으려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선생님은 묘한 표정으로 차태우를 한 번 보고 다시 쪽지를 한 번 보았다.
“감독관님, 읽으세요. 쟤가 뭘 베꼈는지 다들 보게요!”
차태우가 안달이 나서 재촉했다.
안달이 나 하는 차태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불안감이 한층 더 강해졌다.
단순한 커닝 페이퍼였다면 선생님이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었다.
머릿속이 뒤엉킬 무렵, 선생님은 이미 쪽지 뒷면의 글자를 읽고 있었다.
“시험 끝나고 학교 건너편 RJ호텔로 와요, 하람 선배. 깨끗이 씻고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