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章
단옷날, 나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약속했던 남자 친구가 갑자기 잠적했다.
밤이 되어서야 나는 SNS에서 남자 친구가 실수로 올린 듯한 게시물을 발견했다.
[스무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우리의 청춘도 이제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네.]
그 글과 함께 혼인신고서와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
사진 속 낯선 여자는 송지욱의 어깨에 다정하게 기댄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노에 휩싸인 채 댓글 창을 눌러 따져 물으려던 순간, 내 절친 정채린이 남긴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결혼하는 거야? 정말 축하해. 드디어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결혼하는구나!]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덜덜 떨면서 정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하던 정채린이 마침내 진실을 얘기해 주었다.
“맞아. 사실 두 사람은 8년 전부터 사귀고 있었어. 나 말고도 다들 알고 있던 사실이야.”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속이 좁은 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난리 칠까 봐 그랬어.”
“솔직히 민하랑 지욱이가 더 잘 어울려. 그리고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았어. 같은 여자로서 굳이 민하를 힘들게 하지는 마. 좀 착하게 살아.”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차갑게 식은 눈물이 오히려 뜨거운 불길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송지욱이 12년을 함께하는 동안, 송지욱은 무려 8년을 다른 여자와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패가 되어 나를 속이고 있었다.
제1화
나는 자신을 괴롭히듯 계속해서 댓글 창을 들여다봤다.
내 절친 정채린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하나같이 축하하고 있었다.
[민하는 정말 좋은 여자야. 민하를 속상하게 한다면 내가 제일 먼저 너를 가만 안 둘 거야!]
댓글을 남긴 사람은 송지욱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지난주에 만났을 때만 해도 나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렀던 사람이다.
[가장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다니, 정말 축하해. 오늘 밤에는 같이 먹고 죽자!]
그 댓글을 남긴 사람은 나와 같이 2층 침대를 썼던 룸메이트였다.
[다 같이 모이는 건 좋은데 내 동생과 민하의 행복을 위해 다들 입단속 잘하도록 해. 절대 걔가 알게 해서는 안 돼.]
그 댓글은 송지욱의 누나가 남긴 것이었다. 몇 년 전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내게서 2천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고, 자신이 인정하는 제수씨는 나뿐이라고 했던 사람이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공주님과 왕자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절대 그 마녀가 이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되죠. 걱정하지 말아요!]
그건 송지욱의 회사에 새로 들어온 어린 비서가 남긴 댓글이었다.
눈치가 없고 어리숙한 편이라 몇 번이나 해고될 뻔했지만, 내가 좋은 말을 많이 해 주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꼭 알아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준 덕분에 무사히 인턴 기간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젖히며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송지욱이 다른 여자와 8년 동안 만났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사실을 내게 숨겼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사람이었고, 왕자와 공주의 행복을 망치려는 마녀였으며, 그들에게는 한낱 웃음거리였다.
휴대폰을 새로고침 하자 송지욱의 게시글이 갑자기 화면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하루 종일 연락이 두절됐던 송지욱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미안해. 오늘 회사에 갑자기 일이 터지는 바람에 업무를 처리하느라 지금까지 휴대폰을 볼 시간조차 없었어.”
“요즘 회사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혼인신고는 잠시 뒤로 미루자.”
“참, 오늘 SNS에서 뭐 재미있는 글 못 봤어?”
송지욱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서툴게 나를 떠보려고 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너는 오늘 내 전화 계속 안 받았잖아. 그리고 나는 병원에서 엄마를 돌보느라 SNS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어.”
“일단 일부터 봐. 혼인신고 관련해서는... 다음에 너 시간 있을 때 다시 얘기하자.”
작년에 우리 엄마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 말로는 길어봤자 3년이라고 했다.
우리 엄마의 유일한 소망이 내가 서른이 되기 전에 송지욱과 혼인신고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단오이자 나의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병실에서 내가 혼인신고를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더 이상 엄마의 마지막 소망을 이뤄줄 수가 없었다.
송지욱이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은 채 몸을 한껏 웅크렸다.
눈물이 화면 위로 쏟아져 내려 검은 글씨가 번졌다.
나는 화면을 닦은 뒤 그들이 축하 파티를 벌이기로 한 장소를 확인했다.
[골든 레스토랑 302호.]
제2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반짝이는 컨페티가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알록달록한 컨페티들 사이로 송지욱이 다른 여자와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의 친구들이 휴대폰을 들고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는 순간, 그들의 낭만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를 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다들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아무도 나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여자는 송지욱을 힐끗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기야, 저 사람도 자기 친구야? 그런데 왜 다들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진 거지?”
“민하야, 쟤는...”
나는 송지욱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최민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송지욱의 여자 친구예요.”
“두 사람이 8년 동안 사귀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랑 송지욱은 12년을 만났어요.”
“믿기지 않는다면 내 휴대폰 앨범에 있는 영상을 보여줄게요.”
앨범을 클릭하자 지난 12년 동안 쌓아 온 추억들이 고스란히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수능을 앞두고 열렸던 학교 행사에서 학생 대표로 발언했던 송지욱은 당시 공개적으로 내게 고백했다.
“사실 제 꿈은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한예서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도 제 꿈입니다.”
대학교 운동장에서 손을 맞잡고 산책하던 날, 송지욱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 약지에 끼워 주었다.
500만 원이 아주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송지욱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저축해서 모은 전 재산이었다.
“나중에는 더 큰 걸로 해줄게.”
비좁은 월세방에서 송지욱은 술에 취한 채 나를 안고 엉엉 울다가 나한테 영상을 찍으라고 강요하더니 카메라 앞에서 맹세했다.
“이번 생에는 꼭 한예서를 호강시켜 주겠습니다.”
“평생 한예서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회사의 상장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나와 송지욱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친구들의 짓궂은 농담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야, 송지욱. 이제는 우리 예서랑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송지욱은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할 거야. 신혼집은 지금 공사 중이야. 예서가 서른 살 생일을 맞으면 그때 혼인신고 하려고.”
오늘이 바로 내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
내 생일이자 혼인신고를 약속했던 바로 그날 말이다. 그러나 송지욱은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와 함께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
마지막 영상이 끝났다.
넓은 룸 안은 숨소리마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 자리에는 내 절친과 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나와 송지욱의 기나긴 연애를 지켜본 증인인 동시에 나를 배신한 자들이었다.
영상을 다 보고 나자 최민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송지욱이 마치 백마 탄 왕자처럼 앞으로 나서며 최민하를 자신의 뒤로 감추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서야, 그만해.”
“전부 내 잘못이야. 너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한 상태에서 미련하게 민하를 사랑하게 되었어. 너도 죄가 없지만 민하도 죄가 없어.”
“화가 난다면 나한테만 풀도록 해. 죄 없는 민하는 끌어들이지 마.”
최민하는 송지욱의 뒤에서 몸을 반쯤 내밀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나를 바라보며 아주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충격을 받을 거예요. 저는 그쪽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저랑 지욱이는 이미 혼인신고를 했어요. 지욱이는 제 남편이고 저는 지욱이 아내예요. 부부로서 우리는 모든 고난을 함께 이겨낼 거예요.”
“지욱이는 책임감이 강한 좋은 남자예요. 바라는 게 있다면 편하게 말해요. 우리가 최대한 돈으로 보상해 줄게요.”
보상?
12년 동안 만난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한 내가 바라는 게 고작 금전적 보상을 해주겠다는 말 한마디였을까?
내가 화를 내려는데 정채린이 뜬금없이 헛기침을 해대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예서야, 적당히 해. 사실 민하도, 지욱이도 잘못이 없어.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 누가 먼저였는지를 따지는 건 아무 의미 없어.”
“나는 네 가장 친한 친구니까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야. 그냥 조용히 물러나. 그게 모두를 위한 일이야. 그리고 너도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고 말이야. 괜히 소란을 벌여 봤자 좋을 게 없어. 혹시라도 일이 크게 번지면 앞으로 누가 너랑 결혼하려고 하겠어?”
나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의 가장 친한 친구를 바라봤다.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송지욱의 누나, 그리고 나와 송지욱의 친구들도 나섰다.
“예서야, 너는 좋은 여자야. 하지만 민하는 너보다 더 좋은 사람이야. 조선 시대였다면 솔직히 너랑 민하 모두 내 동생이랑 함께 살기를 바랐을 거야.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그럴 수가 없잖아. 지욱이도 결국에는 둘 중 한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예서 언니, 제가 옆에서 지켜봤는데 지욱 오빠는 민하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해요. 그러니까 언니가 아니라 민하 언니랑 혼인신고를 했죠. 어차피 이렇게 돼버렸으니 그냥 지욱 오빠를 놓아줘요.”
송지욱과 최민하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마치 두 사람을 지키는 견고한 벽처럼 두 사람 뒤에 서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공공의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 더 이상 소란을 피울 힘조차 없었다.
그래서 약지에 끼고 있던, 이제는 빛이 바랜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서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반지와 함께 지난 12년간의 청춘과 사랑, 우정을 전부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알겠어.”
“내가 빠질게.”
제3화
“예서야!”
송지욱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오늘 엄마의 안색이 평소보다 훨씬 좋았다.
엄마는 내게 갓 깎은 사과를 건네며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예서야, 혼인신고 했지? 사진도 찍는다더니 예쁘게 찍었어? 어서 엄마한테 보여줘 봐.”
순간 숨이 막히고 코끝이 찡했다.
엄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마 진실을 알게 할 수는 없었다.
내가 겨우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털어놓으려는 순간, 송지욱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송지욱은 침대 옆에 앉더니 늘 그랬듯이 자연스럽게 우리 엄마를 마사지해 주면서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서가 사진이 안 예쁘게 나왔다고 사진관에 다시 보정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혼인신고는 이틀 뒤쯤에 하려고요. 혼인신고 하게 되면 꼭 알려드릴게요, 장모님.”
갑자기 장모님이라는 호칭에 우리 엄마는 감동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서인지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송지욱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빠져줬잖아. 그런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송지욱은 예전처럼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예서야, 우리 12년 동안 만났잖아. 정말 나랑 헤어질 수 있어? 아쉽지 않겠어?”
아쉽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송지욱은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었는데 말이다.
나는 빨개진 눈으로 송지욱을 노려보며 차갑게 비웃음을 흘렸다.
“아쉽든 아쉽지 않든 정리해야 하는 건 맞지.”
내가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하자 송지욱이 몸을 틀어 내 앞길을 막아섰다.
송지욱은 내 어깨를 잡더니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나를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난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송지욱이 너무 세게 끌어안은 탓에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대학교 때 너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 주려고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민하를 알게 되었어.”
“민하는 낯을 많이 가리는 애라서 말할 때면 늘 얼굴이 빨갰어. 항상 양아치 같은 애들한테 괴롭힘당했는데 내가 자주 도와줬어.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됐어.”
“한 번은 흑심을 품은 손님이 약을 탄 적이 있어. 내가 바에 뛰어 들어가서 구해 줬는데, 그때 민하가 내게 먼저 입을 맞췄어. 나도 참지 못하고 그만...”
“민하와의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 하지만 민하도 잘못은 없잖아. 그래서 양심 때문에 차마 민하에게 상처를 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책임을 지려고 했어.”
“그동안 민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 곁에 있어 줬어. 울지도 않고, 소란을 벌인 적도 없고, 내게 뭘 요구한 적도 없어. 나는 민하한테 미안한 게 너무 많아. 그래서 혼인신고로 보상해 줘야 해.”
12년과 8년은 단순히 겹쳐 있던 숫자가 아니었다.
내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고 바보처럼 웃고 있을 때 송지욱은 다른 여자와 몸을 섞었다.
내가 월세방에서 송지욱이 가장 좋아하는 갈비찜을 만들어 놓고 그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송지욱은 다른 여자가 끓여 준 라면을 먹었다.
내가 행복해했던 그 수많은 순간이 사실은 배신당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만해. 나는 너희가 어쩌다가 붙어먹었는지 듣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꺼져!”
나는 울면서 송지욱의 어깨를 깨물었다.
곧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송지욱은 아파서 몸을 파르르 떨면서도 저항하지 않았다.
송지욱은 통증을 참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록 혼인신고는 민하랑 했지만 민하가 가진 거, 너한테도 다 줄 거야.”
“사랑, 돈, 함께하는 시간, 그리고 어머님에 대한 내 효심도 민하랑 결혼했다고 해서 줄어들거나 하지 않을 거야.”
“참, 최근에 해외에서 위암 말기 환자에게 굉장히 효과적인 치료제가 나왔대. 예서야, 우리 언제 어머님 모시고 같이 치료받으러 갈까?”
나는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송지욱을 깨물지도 않았다.
그동안 송지욱은 내게 정말 잘해줬다.
최민하라는 존재만 없었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을 것이다.
송지욱은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가격을 따지지 않고 뭐든 사주었다.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일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꼭 같이 가줬다.
엄마가 병에 걸린 뒤로는 직접 우리 엄마를 돌봐주기도 했고, 밤늦게까지 의사와 함께 치료 방법을 의논하기도 했다.
비싼 치료비 역시 줄곧 송지욱이 부담해 왔다.
그래서 나는 송지욱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적어도 엄마가 다 나을 때까지는 송지욱을 떠날 수 없었다.
제4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전히 송지욱이 마련해 준 신혼집에서 지내며, 낮에는 출근하고 저녁에는 병원에 가서 엄마를 돌봤다.
송지욱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느라 나에게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연락이 없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해방이나 다름없었다.
퇴근 후 나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호떡을 사서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병상 앞에 젊은 여자 두 명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감정이 격해진 상태로 다가갔고, 그들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채린과 최민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채린아, 왜 이 사람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 거야?”
엄마는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채린이는 내가 심심할까 봐 자기 친구를 데리고 와서 말벗을 해 준 거야.”
“나는 민하를 오늘 처음 봤는데 정말 마음에 들어. 이렇게 다정하고 예쁜 아이인데 남편이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운다지 뭐니? 정말 못됐어.”
“민하야, 이모 말 잘 들어.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여자는 반드시 벌받게 돼 있어.”
최민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 바라본 뒤 우리 엄마를 향해 부드럽지만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이모, 이모 말씀이 맞아요. 다른 사람 남편을 넘보는 여자는 반드시 벌받을 거예요.”
“그런데 이모 딸은 언제쯤 벌을 받나요? 아, 아니다. 이미 벌을 받았네요. 단지 벌을 받은 사람이 본인이 아니라 이모일 뿐이죠. 위암 말기라니, 그 정도면 저도 만족할게요.”
우리 엄마는 창백해진 얼굴로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며 최민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정채린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혼인관계증명서를 우리 엄마 앞에 내던지며 말했다.
“헛소리라니요? 민하 말은 사실이에요. 한예서가 바로 그 불륜녀예요!”
“이것 보세요. 민하는 이미 지욱이랑 결혼했어요. 둘은 법적으로 부부라고요. 한예서는 지욱이한테 아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뻔뻔하게 지욱이가 사준 집에서 지내고 있고, 지욱이 돈으로 이모 병원비도 내고 있어요. 그 돈은 부부 공동재산이에요. 민하에게는 그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어요!”
오늘은 6월 19일로 단오이자 나의 생일이었다.
우리 엄마는 혼인관계증명서에 적힌 혼인신고 날짜를 확인하더니 충격을 받은 건지 갑자기 피를 토했다.
“엄마!”
나는 우는 와중에 호출 벨을 누르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정채린과 최민하가 합심하여 나를 막았다.
최민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엄마가 그랬어요. 불륜녀는 결국 벌을 받게 된다고요. 오늘 당신 엄마가 벌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반성하지 않고 계속 내 남편한테 꼬리를 치겠죠.”
“죽으면 오히려 더 좋죠.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내 남편이 왜 빌어먹을 당신이랑 당신 엄마를 위해 돈을 써야 해요?”
나는 정채린에게 제발 우리 엄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정채린은 코웃음을 치면서 경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절친? 나는 불륜이나 저지르는 애랑은 친구 안 해. 민하야말로 내 절친이야.”
“너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나보다 잘났었지. 얼굴도 나보다 예쁘고, 성적도 나보다 좋았고, 남자도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났었지. 평소 착한 척 가식 떠는 네 모습이 진짜 역겨웠어. 나는 네 동정 따위 필요 없어. 오늘 이 모든 건 네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야!”
나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고, 귓가에서는 윙윙거리는 이명이 들려왔다.
나의 배려와 양보가 정채린에게는 전부 가식이었다.
나는 정채린을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정채린은 나를 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설명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나를 바닥에 짓눌러 놓았고,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엄마가 병상 위에서 심하게 경련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심전도 모니터에 표시된 파형은 한동안 미친 듯이 요동치더니, 이내 천천히 일직선으로 변했다.
초록색 선이 곧게 뻗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평소 엄마가 내게 사과를 깎아줄 때 쓰던 칼을 움켜쥐고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리 엄마를 죽인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으로 말이다.
“한예서, 너 미쳤어?”
송지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앞선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두 사람에게 달려드는 내 모습만 본 송지욱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최민하를 자신의 뒤로 감추며 그녀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칼끝이 송지욱의 심장을 찌르기 전, 나는 순간적으로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칼끝은 내 가슴을 푹 찔렀고 그 탓에 송지욱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송지욱은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끌어안더니 목이 찢어질 듯 소리쳤다.
“한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