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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외면했던 온기의 기록
결혼한 뒤로 나와 남편은 줄곧 각방을 썼다. 처음에는 내가 먼저 안방으로 들어와 같이 자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강준혁은 망설이지도 않고 거절했다. “안 돼. 미래가 싫어할 거야. 애초에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그렇게 끝나지 않았어. 그냥 지금처럼 지내자.” 미래는 그의 첫사랑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중에는 어차피 이 결혼도 자금줄이 막힌 우리 집을 살리고, 동시에 강준혁의 회사가 휘말린 골치 아픈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맺어진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은 셈이니 일이 다 끝나면 당연히 각자의 길을 가면 됐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뒤로 3년 동안 강준혁은 어디를 가든 늘 송미래를 데리고 다녔다. 가족 모임에도, 회사 연말 행사에도, 심지어 우리 엄마 생일에도 강준혁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송미래였다. 사람들은 대체 누가 이 집의 안주인이냐며 수군거렸다. 이제는 잘됐다. 해결할 일은 전부 끝났으니까. 나도 이제 떠날 때가 됐다.
챕터 (1)
第1章
결혼한 뒤로 나와 남편은 줄곧 각방을 썼다.
처음에는 내가 먼저 안방으로 들어와 같이 자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강준혁은 망설이지도 않고 거절했다.
“안 돼. 미래가 싫어할 거야. 애초에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그렇게 끝나지 않았어. 그냥 지금처럼 지내자.”
미래는 그의 첫사랑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중에는 어차피 이 결혼도 자금줄이 막힌 우리 집을 살리고, 동시에 강준혁의 회사가 휘말린 골치 아픈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맺어진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은 셈이니 일이 다 끝나면 당연히 각자의 길을 가면 됐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뒤로 3년 동안 강준혁은 어디를 가든 늘 송미래를 데리고 다녔다.
가족 모임에도, 회사 연말 행사에도, 심지어 우리 엄마 생일에도 강준혁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송미래였다.
사람들은 대체 누가 이 집의 안주인이냐며 수군거렸다.
이제는 잘됐다.
해결할 일은 전부 끝났으니까.
나도 이제 떠날 때가 됐다.
제1화
나는 서재에 앉아 이혼 합의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읽었다.
흰 종이 위에 적힌 검은 글씨는 조항마다 깔끔하고 명확했다.
재산 분할 항목에서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결혼 전부터 강준혁의 소유였던 이 집도, 차도 모두 그에게 돌아가고 회사 지분 역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내 명의의 예금만 가져가면 됐다.
합의서 아래에 내 이름을 적었다.
[서다희.]
3년 전만 해도 이해관계에서 시작된 결혼이지만 잘 노력하면 괜찮은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바보 같았다.
합의서를 서류 봉투에 넣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그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와. 상의할 게 있어.]
2분쯤 지났을 때 그의 프로필 사진 옆에 한 글자가 떴다.
[응.]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소파 위에 던졌다.
나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주방은 넓었다. 양문형 냉장고와 빌트인 오븐, 독일산 조리도구까지 하나같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거의 쓰지 않았다.
신혼 초에는 강준혁이 집에 돌아왔을 때 따뜻한 밥이라도 먹었으면 해서 몇 번 요리를 해 본 적이 있었다.
처음 만든 건 돼지 갈비찜이었다. 그는 한입 먹어 보고 괜찮다고 했다.
그러고는 전화를 한 통 받더니 미래에게 일이 생겼다며 나가 버렸다.
두 번째로 생선요리를 만들었을 때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 번째에는 상이 꽉 찰 만큼 음식을 차렸다. 오후 4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3시간을 부엌에서 보냈다.
그날은 강준혁이 집에 돌아오기는 했다. 하지만 송미래와 함께 왔다.
둘은 웃고 이야기하며 집에 들어왔다.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을 본 강준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우리 약속 있어. 나가서 먹을 거야.”
송미래는 그의 뒤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고생했네요.”
지금도 그때 그 웃음을 떠올리면 속이 뒤틀린다.
그 뒤로 나는 다시는 요리하지 않았다.
저녁 7시, 강준혁은 돌아오지 않았다.
8시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9시쯤 휴대전화가 울렸다.
확인해 보니 강준혁이 보낸 메시지였다.
[미래한테 일이 좀 생겨서 늦을 거야. 먼저 자. 기다리지 말고.]
나는 그 메시지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먼저 자. 기다리지 말고.’
3년 동안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매번 똑같았다. 늘 송미래 때문이었다.
송미래에게는 언제나 일이 생겼고, 강준혁은 언제나 달려가야 했다.
감기에 걸려도 곁에 있어 줘야 했고, 기분이 안 좋아도 위로해 줘야 했고, 이사를 해도 도와줘야 했다.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을 때조차 강준혁이 필요했다.
한번은 송미래가 시내 서쪽에 있는 유명한 가게의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하자, 강준혁은 차로 40분이나 달려가서 케이크를 사 왔다. 그걸 송미래의 아파트까지 가져다주고, 다 먹는 것까지 보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새벽 1시였다.
나는 강준혁에게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그는 대답했다.
“미래 집에서 먹었어.”
그리고 샤워를 하고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사실 그날 나는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결혼까지 했으니 서로에게 시간을 조금은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강준혁도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내가 충분히 잘하고, 충분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 집을 한 번쯤 돌아봐 줄 거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애초에 마음속에 내 자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잘해 봐야 소용없는데.
내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어도 그 이유로 날 좋아해 주지는 않는다. 그저 내가 괜찮은 게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강준혁의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매번 ‘응’이라고 답해 알았다는 뜻을 전했다.
가끔은 ‘그럼 조심히 들어와’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내가 얼마나 이해심 많고 철든 아내인지 보여 주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답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강준혁의 메시지를 받을 일도 없어질 테니까.
제2화
휴대전화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TV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연예인 몇 명이 무대에서 유난히 큰 소리로 떠들고 웃고 있었다.
소파에 기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모든 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60평이 넘는 이 집에서 이름뿐인 결혼을 붙잡은 채, 평생 나를 마음에 두지 않을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지금 첫사랑 곁에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송미래의 곁에 있었고, 조금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 행동했다.
결혼할 때부터 강준혁은 분명히 말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 거야.”
그 말은 결국 내가 자신과 송미래를 갈라놓았다는 뜻이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억지로 헤어지게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우리 집안의 힘과 그 소송을 이용해서 내가 그를 억지로 결혼이라는 굴레에 묶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아빠 회사는 자금줄이 끊겨 급하게 운전자금이 필요했다.
반면 강준혁의 회사는 까다로운 소송에 휘말렸고, 우리 집안의 인맥이 필요했다.
양가 어른들이 한자리에 모여 밥 한 끼를 먹고는 그대로 이 결혼을 결정했다.
나에게 결혼하고 싶은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준혁에게 나와 결혼하고 싶은지 물은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이 결혼은 공평한 거래였다.
강준혁의 집에서는 돈을 대고, 우리 집에서는 인맥을 내놓았다. 서로 필요한 걸 얻은 셈이었다.
그 거래에서 유일하게 희생자가 된 사람은 송미래였다.
강준혁은 내가 송미래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송미래를 당당한 여자친구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첫사랑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그래서 강준혁은 모든 미안함을 송미래에게 주고, 모든 냉정함은 내 몫으로 남겼다.
신혼 첫날 밤, 강준혁은 술을 잔뜩 마신 채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침실로 들어왔다.
내가 외투를 벗겨 주고 넥타이를 풀어 주자, 갑자기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겁이 날 정도였다.
“서다희.”
강준혁은 쉰 목소리로 내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이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너도 잘 알잖아. 난 널 사랑하지 않아. 평생 사랑할 일도 없어. 눈치가 있으면 얌전히 내 아내 노릇이나 해. 내가 널 안아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내 손을 놓은 강준혁은 비틀거리며 손님방으로 갔다.
그날 이후 우리는 계속 각방을 썼다.
강준혁은 손님방에서 자고, 나는 안방에서 잤다.
문득 지난 3년 동안 강준혁이 이 안방에 들어온 건 단 두 번뿐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 번은 신혼 첫날 밤, 방금 그 말을 하러 왔을 때였다.
다른 한 번은 작년에 내가 열이 39.5도까지 올라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을 때였다.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강준혁에게 전화했고, 그는 2시간이나 지나서야 돌아왔다. 침실 문 앞에 서서 나를 한번 훑어본 뒤 아주머니에게 나를 병원에 데려가라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나가 버렸다.
송미래에게 중요한 모임이 있어서 자신이 꼭 가야 한다고 했다.
그날 밤 강준혁은 끝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 7시에 눈을 떴을 때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아무 메시지도 와 있지 않았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아주머니가 이미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 혼자 내려오는 걸 본 아주머니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한마디만 물었다.
“사모님, 오늘 아침은 뭐 드시겠어요?”
“쌀죽이면 돼요.”
식탁에 앉자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강준혁이 보낸 메시지였다.
[어젯밤 미래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밤새 돌봐 줬어. 오늘 오전에 회의가 있어서 집에는 안 들어갈게.]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죽을 한 숟갈 떠먹었다.
“아주머니, 며칠 동안 박스 좀 여러 개 사다 주세요.”
아주머니가 잠시 멈칫했다.
“사모님, 이사 가세요?”
“네. 며칠 뒤에요.”
아주머니는 무언가 묻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가 내 표정을 보고는 다시 말을 삼켰다.
지난 3년 동안 이 집에서 지내며 모든 걸 지켜본 사람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을 터였다.
“네, 사모님.”
제3화
아주머니는 대답하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죽을 다 먹은 뒤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부동산 중개인과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이 집을 나가기 전에 새로 살 곳을 구해야 했다.
이혼 합의서에서 재산을 하나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빈털터리는 아니었다.
결혼 전에 모아 둔 돈이 조금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강준혁 집안에서 매달 생활비로 400만 원씩 내 통장에 넣어 줬고, 나는 거의 쓰지 않아 절반 넘게 모아 두었다.
그 돈을 합치면 괜찮은 아파트를 하나 빌려 1년쯤 버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 이후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됐다.
중개인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젊은 여자였는데 말이 무척 빨랐다.
그녀는 시내 동쪽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집을 보여 줬다. 중심가와 멀지 않았고 단지 환경도 괜찮았다.
“이 집은 채광이 정말 좋아요. 집주인이 얼마 전에 새로 인테리어해서 가구랑 가전도 전부 새 제품이고요. 월세는 130만인데 어떠세요?”
나는 베란다에 서서 바깥을 바라봤다. 시야가 탁 트여 멀리 있는 공원까지 보였다.
집은 크지 않았지만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강준혁과 관련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좋아요. 이 집으로 할게요.”
중개인은 내가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 몰랐는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금세 환하게 웃었다.
“네, 좋아요. 그럼 바로 집주인한테 연락해서 계약 진행할게요!”
나는 1년짜리 임대 계약을 맺고 보증금과 월세를 냈다.
열쇠를 받아 밖으로 나오니 햇볕이 따뜻하게 몸을 감쌌다.
길가에 서서 손안의 열쇠를 내려다보는데 문득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아주머니가 박스를 몇 개 사다 거실에 놓아두었다.
위층으로 올라가 드레스룸부터 정리하려던 순간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누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어머, 집에 있었네요.”
나는 몸을 돌렸다.
현관에 송미래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박스를 보더니 잠시 내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짐 정리하는 거예요?”
나는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송미래 씨가 여긴 왜 왔어요?”
“준혁이가 데려다줬어요. 제가 살던 집 계약이 끝났는데 아직 새집을 못 구했거든요. 준혁이가 일단 여기서 지내래요. 얼마나 오래 있어도 상관없다고 했어요.”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송미래는 내가 이렇게 반응할 줄 몰랐는지 미소가 잠깐 굳었다.
“괜찮겠어요?”
송미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나도 사실 좀 불편할 것 같다고 했는데 준혁이가 꼭 오라고 해서요. 걔가 그러더라고요...”
“준혁 씨가 오라고 했으면 그냥 있어요.”
내가 말을 끊었다.
“어차피 방도 많으니까.”
송미래는 입술을 꾹 다물더니 소파로 가 앉았다.
“서다희 씨는 정말 마음도 넓네요. 그때도 그렇게 너그럽게 이 집에 시집오더니, 이제는 나까지 집에 들여 주네요.”
송미래를 보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났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송미래가 목소리를 높였다.
“서다희 씨, 나 지금 말하고 있잖아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들었어요. 그런데 송미래 씨도 나랑 수다 떨러 온 건 아니잖아요. 괜히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 있어요? 난 짐 정리해야 해서 그만 가볼게요.”
송미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가려고요?”
송미래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아니면 여기 남아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으라고요?”
제4화
송미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나는 혼자 거실에 서 있는 그녀를 남겨 둔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옷장을 열고 옷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산 것치고는 옷이 많지 않았다.
강준혁은 한 번도 나와 쇼핑을 하러 간 적이 없었고, 선물을 준 적도 없었다.
결혼기념일에도 없었고, 생일에도 없었다. 밸런타인데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다.
마지막 코트까지 접어 박스에 넣고 테이프를 붙이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확인해 보니 강준혁에게 온 메시지였다.
[오늘 저녁은 접대가 있어서 밖에서 먹을 거야. 미래가 막 들어왔으니까 손님방 좀 정리해 줘.]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계속 짐을 쌌다.
해 질 무렵에는 드레스룸과 서재 정리가 거의 끝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송미래가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곧 내 손에 든 이혼 합의서 봉투에 멈췄다.
“그게 뭐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봉투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맞은편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송미래는 그 봉투를 몇 초 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혼 합의서에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상 인정한 셈이었다.
그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놀라서가 아니라 기뻐서였다.
“진짜 준혁이랑 이혼하려고요?”
“네.”
“언제요?”
“준혁 씨 들어오면 얘기하려고요.”
“애초에 이 결혼은 서로 필요해서 한 거였어요. 이제 할 일도 다 끝났고, 빨리 정리하는 게 서로한테 좋죠.”
송미래는 한참 동안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서다희 씨.”
그녀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정말 준혁이를 안 좋아해요?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거예요?”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좋아하지 않느냐고?’
3년 전 막 결혼했을 때만 해도 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강준혁은 잘생겼고, 사업도 잘됐으며,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면 유난히 빛났다.
내가 충분히 잘하고, 충분히 다정하고, 충분히 철이 들면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나를 봐 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송미래에게 대답했다.
“좋아했든 아니든 다 지난 일이니까요.”
밤 9시, 강준혁이 돌아왔다.
그는 먼저 소파에 앉아 있는 송미래를 바라보며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미래야, 지낼 만해?”
송미래는 꿀이라도 바른 듯 달콤한 목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응, 좋아.”
그제야 강준혁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는 나를 한번 훑어본 뒤 거실 테이블 위의 서류 봉투와 내 뒤에 쌓인 박스를 차례로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저 박스들은 뭐야?”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의 서류 봉투를 집어 강준혁의 앞에 내밀었다.
“강준혁, 우리 얘기 좀 해.”
그는 봉투를 받지 않은 채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게 뭔데?”
“이혼 합의서.”